송창식 나이 키 프로필 부인 한성숙 노래 우리는 가사 쎄시봉
한국 포크송의 거장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천재 뮤지션 송창식이 열린음악회 1507회에 나옵니다.
오늘은 송창식 나이 키 프로필 부인 노래 우리는 가사 쎄시봉 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송창식 나이 키 프로필 부인 한성숙 노래 우리는 가사 쎄시봉
송창식 열린음악회 1507회 출연진
- 녹화 일시: 2024.11.26 (화) 19:30~
- 방송 일시: 2024.12.22 (일) 17:40~
- 장 소: KBS홀
◎ 출연진
01. 내일로 가는 계단 / 김소현 + 손준호 + 뉴위즈덤하모니
02. All I Ask of You / 김소현 + 손준호
03. 마지막 사랑 / 박기영
04. Butterfly / 박기영
05. 제3한강교 / 홍지윤
06. 정말 좋았네 / 홍지윤
07. 사나이 가슴에 비가 내리네 / 박지현
08. 그대가 웃으면 좋아 / 박지현
09. 하루 또 하루 / 뮤지컬<시라노> 조형균 + 나하나 + 임준혁
10. 곧, 가스콘 용병대 Reprise / 뮤지컬<시라노> 조형균 + 최호중 + 뮤지컬 '시라노' 앙상블
11. 거인을 데려와 / 뮤지컬<시라노> 최재림
12. GPT / STAYC(스테이씨)
13. Teddy Bear / STAYC(스테이씨)
14. 영원을 약속해줘요 / 김민석(멜로망스)
15. 선물 / 김민석(멜로망스)
16. 한 번쯤 / 송창식 + 기타리스트 함춘호
17. 우리는 / 송창식 + 기타리스트 함춘호
18. 담배 가게 아가씨 / 송창식 + 기타리스트 함춘호
송창식 나이 키 프로필 부인 한성숙 노래 우리는 가사 쎄시봉
송창식 고향은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입니다.
사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송창식은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송영숙(宋泳璹, 1922. 6. 17 ~ 1951)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백령도로 출전했던 아버지가 전사하고, 9살 되던 1955년에는 행상을 다니던 어머니 안동 김씨도 가출해 행방불명된 뒤 조부모 슬하에서 불우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하네요.
인천신흥국민학교와 인천중학교를 거쳐 서울예술고등학교 성악과에 수석 입학하였다고.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던지, 인천중학교 재학 때 "남들도 날 모차르트라고 불렀고, 나도 스스로 모차르트라고 생각했다"고 하죠.
중학교 3학년 때에는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 1등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공부도 잘 해 늘 우등생 집단에 속했지만, 그는 음악에 인생 목표를 정하고 제물포고등학교를 가라는 집안 어른들의 말을 거역한 채, 서울예고 성악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군경 유자녀 장학금과 심부름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겨우 이어가긴 했으나,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결국 유급 통지서를 받아 그는 학교를 중도에 포기하기로 하고, 결국 1년을 다닌 후 중퇴하였다고.
서류상으로는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에는 전몰 상이군경 자녀는 퇴학시킬 수 없는 법령이 시행 중에 있어 서울예고에서 서류상으로만 특별히 졸업 처리해 준 것이라고 합니다.
서울예고 동창으로는 금난새가 있다고.
금난새가 학창시절을 회상하며 "음악에 정말 천재였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가난해서 매일 수돗물로 배를 채우던 기억이 난다"라고 말한 적이 있죠. 그 친구가 바로 송창식.
송창식은 세시봉 출신으로 1970-1980년대 포크송계를 주름잡았던 가수로 윤형주와 함께 듀엣 트윈폴리오로 데뷔했다가 윤형주의 일방적 해체통보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1970년에 솔로로 전향했다고 합니다.
금전 관리가 철저했고 사업수완이 있었던 윤형주는 많은 재산을 축적해 재산가가 된 반면에 사람이 너무 좋아서 보증도 서 주고 돈도 꿔 달라는 대로 꿔 주던 송창식은 많은 재산을 잃었다고.
물론, 송창식이 돈을 잘 벌던 시절에 알랑대며 돈을 꿔 간 사람들 중 제대로 갚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빈털터리인 것은 아니며,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저작권료로만 매해 7,500만원의 고정 수입이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세시봉 멤버들이 나와서 토크할 때 송창식의 가난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부분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넘어서 달랑 기타 하나를 들고 노숙하면서 지내고 노래 불러주면서 밥을 얻어먹고 이 집에서 며칠 저 집에서 며칠 하는 식으로 생활했을 정도로 매우 가난했다고 하죠.
이후 방황하다가 어느날 AFKN 흑인 아마추어들이 블루스 경연대회를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고.
아마추어라고 비웃다가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고 20년간 음악을 해왔는데 아마추어만도 못한실력이였다고 눈물을 흘리며 절망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피나는 연습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더욱 갈고 닦아 클래식 창법으로 대중가요계에 등장한 조영남을 만나면서 가수로 데뷔.
이후 세시봉과 오비스 캐빈에서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김민기, 양희은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만났고 특히 윤형주와 트윈폴리오를 하면서 재능이 만개했습니다.
당시 60~90년대 한국 가요사에서 단 한 명의 천재를 꼽는다면 작사, 작곡은 '송창식'이라고 음악인들은 말합니다.
은근히 서로 자존심이 센 세시봉 멤버들조차 송창식의 천재성은 입을모아 칭송할정도.
가사들도 너무 좋은데 우리는 가사만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가사)
우리는 빛이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수 있는
우리는 아주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없는 침묵으로도 말할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연인
기나긴하 세월을 기다리어 우리는 만났다
천둥치는 운명처럼 우리는 만났다
오 바로 이순간 우리는 하나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
우리는 바람부는 벌판에서도 외롭지 않은
우리는 마주잡은 손끝하나로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기나긴 겨울밤에도 춥지 않은
우리는 타오르는 가슴 하나로 너무 충분한
우리는 우리는 연인
수없이 많은 날들을 우리는 함께 지냈다
생명처럼 소중한 빛을 함께 지녔다
대중에게 어필하는 호소력이나 심미성과 작품성 모두를 만족시키고, 시적인 감수성을 담아낸 품격있는 가사와 가락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작곡가이며, 더불어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
듣는 음악에서 보고 듣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중요시되는 음악으로 변모한 현대음악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한 가객으로서만 남지 않고 한국 가요사에 굵은 획을 그은 천재로 남을 가수이자 예술가.
송창식 우리는 동영상 ▼
음악평론가 강헌이 말하길, 가왕 조용필의 맞은편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단 한 명의 가수라 부를 수 있겠다고 했죠.
대충 부르는 듯 하지만 절대로 따라부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창법이 특징입니다.
마치 해탈한 도인이 너털웃음을 짓는 듯 한 가창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흉내만 내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
막말도 잘 하고 노래에 자부심이 상당한 조영남도 노래에 대해 전혀 태클을 걸지 못했다 할 정도라네요.
실제 윤형주에게는 염소 목소리 같다고 가수를 하지 말라고 디스를 한 적이 있지만, 송창식을 향해서는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단 한번도 디스한 적이 없습니다.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 출연했을 당시 조영남의 증언에 따르면 노숙자도 아니고, 아주 남루한 사람이 다 뜯어진 기타를 가지고 들어와서는 클래식 가곡을 환상적으로 소화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윤형주는 경기고 출신 연세대 의대생의 엘리트 이미지라면, 송창식은 서민적인 이미지로 대변되죠.
윤형주가 미성과 수백곡의 CM송을 작곡한 데서 알 수 있듯 대중친화적인 작곡 능력을 바탕으로 '팝(popular)' 음악을 선보였다면. 송창식은 유니크한 톤의 보컬과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작곡을 통해 창조적인 예술세계를 담은 음악을 선보였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민기가 1978년 살벌한 유신독재 시절 공장의 불빛이란 노래극의 음반을 녹음할 때, 선뜻 자신의 녹음실을 빌려 줬던 사람이 바로 송창식이었다고 합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밀고를 했더라면 송창식도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가서 고문 당하고, 활동금지 처리된 뒤 그날로 가수 생명이 끝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용기라고 할 수 있죠.
공연에 출연할 때 항상 한복을 입는데 1975년 홍콩에서 열린 국제아마추어가요대회에 양복을 입고 참가했다가 어울리지 않아 이후로는 거의 한복을 입고 출연한다고.
인생관, 가치관이 특이한데 매일같이 특이한 체조와 함께 점심마다 같은 음식을 하나 정해서 몇 년 째 먹는다고 합니다.
한때는 스파게티만 3년~4년 째 점심으로 매일 같은 가게에서 먹었다고.
스파게티 주인이 송창식씨가 매일 찾아와서 같은 스파게티를 먹으러 온다고 방송에까지 나왔었죠.
또 송창식은 컴퓨터를 6대나 사용하는 고수로, 아들 송결은 엔씨소프트 게임 기획자라고.
송창식 나이는 1947년 2월 22일생 (77세)이고
아내는 서울예술고등학교 동기인 청주 한씨 한성숙(1948. 6. 14 ~ ).
송창식은 음악과이고 한성숙은 미술과여서 졸업 이후에는 인연이 없었는데, 1976년 12월 31일에 열린 동창모임에서 재회하자 금세 사랑 고백을 하고 보름 뒤에 부산 처가로 찾아가 결혼 승낙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성숙 씨는 우석대학교로 진학하여 대학 시절에 메이퀸을 하기도 했고, 스튜어디스 생활을 거쳐 외국계 무역회사 한국 지사장 등 다양한 사업가로 활동하였다고 하죠.
송창식의 명곡 중 하나인 '사랑이야'의 작사가이기도 한데, 이는 1977년에 송창식이 향토예비군설치법 위반으로 교도소에 있을 때 면회 온 한성숙 씨에게 곡의 마무리를 맡기면서 이뤄졌다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첫째 아들 송결(1978. 2. 11 ~ )만 친자식이고 첫째 딸(송무늬), 둘째 아들(송빛터)은 모두 입양한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입양한 자녀들은 모두 처형과 관계 있다고.
송창식의 아내(한성숙)와 처형(한성순)은 쌍둥이 자매로 둘 다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에 재학하여, 이들 셋은 모두 동기동창 관계.
처형 한성순은 일찍 미국으로 유학하여 회화와 미술관 행정을 전공했으며, 미국에서 '소니아 한'이라는 이름으로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행위예술가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첫째 딸의 경우는 난임인 처형이 아기를 갖고 싶어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을 추진했다가 관련 법규가 바뀌면서 무산되게 되었는데, 이 아이를 거둬 기른 것 둘째 아들의 경우는 이후 처형이 인공수정을 통해 임신 및 출산에 성공했으나, 당시 처형이 직접 양육할 사정이 못 되어 이 처조카를 입양한 것이라고 하네요.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음악으로나 사상으로나 생활으로나
모든 것 하나 범상치 않은 사람 송창식.
그냥 특이하기만 했다면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았겠죠.
그의 음악은 정말 찐입니다. 찐.
앞으로도 오랫동안 좋은 가창 불러주시길
송창식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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